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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아버지의 정 -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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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9가이드
댓글 0건 조회 41,936회 작성일 21-05-22 16:39

본문

어느새 해는 저물었다. 하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낮게 깔린 어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그것을 헤치며 계속해서
달려나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혜지는 아무런말도 하지않은채 입술을 다문 굳은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헤트라이트 불빛만 어둠을 뚫고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차를 몰아간 곳은 한강 고수부지 한남대교 바로 아래쪽에 있는 주차장이었다. 그곳 주차장에는 카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라고 추정되는 몇 대의 차들이 여기저기 듬성듬성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헤치며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곳을 발견했다. 주변을 살피며 내가 발견한 그 곳. 즉, 주차장 한 쪽
구석에 차를 멈췄고 나는 실내 공기를 환기시키려고 차창을 약간 내린 다음 시동을 껐다. 내려진 차창 사이로는 강바람이
들어왔다. 시원하리라는 예상을 무참히 깨버리고, 차창으로 들어온 강바람은 따뜻했던 낮과는 달리 약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그래서 혜지쪽을 바라보니 혜지는 조금 추웠던지 몸을 약간 웅크렸고, 그길로 나는 환기를 중단했으며
곧바로 내렸던 차창을 다시 올렸다.


그후 한동안 우리는 아무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침묵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석으로부터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흑흑흑... 흐흐흐흑... 흑흑" 


그래서 나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 돌렸다. 나와같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혜지가 흐느끼고 있었다. 


"혜지야! 니 와그라노? 속상한 일이라도 있나...?" 

"훌쩍... 훌쩍... 흑흑흑... 훌쩍... 훌쩍..." 

"아까부터 말은 안하고 울기만하니까...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너무 당황스럽다.." 


묵묵히 앉아 있는 줄 알았던 혜지의 울음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또한 한번 터진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같이 흘러내렸다.
뭐가 그리 서러웠던지 연신 울어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혜지에게 우는 이유를 물어봤지만
혜지는 대답하지 않은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혜지야... 선생님에게... 얘길해야지... 이렇게 울기만하고 혼자서 속상해 하는건 몸에 안좋아... 선생님이 도움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속시원히 말해줄 수 없겠나?"
 


오늘 하루종일 웃다가 울다가하는 혜지의 감정 기복에 나는 마음 속으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답답함을
빨리 해소시키려고 했고, 딴에는 위로랍시고 그녀에게 건강운운하며 말도 안되는 말을 건넸다.
 


"혜지야... 평소에 니 모습과 달리 오늘은 왜이프 집에 안좋은 일 있나? 우리 예쁜 혜지가 이렇게 슬퍼할 일이 대체 뭔데?" 

"흑흑....!!!" 

"선생님이 니를 위해 할 수있는 일이라면 다할께... 내가 도울일은 없겠나? " 


그러나 나는 나의 답답함을 그녀에게 그대로 들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마음 속으로 참을 인자를 여러번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는 답답한 마음을 바깥으로 내색하지 않은채 차분한 목소리로 혜지에게 재차 물었다. 그제서야 혜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훌쩍... 전... 선생님이... 훌쩍... 너무 미워요...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훌쩍" 

"뭐? 내가... 밉다니...?! 그게 무슨 말이고? 선생님이 니한테 무슨 잘못한일 있나?" 

"......." 


혜지는 뜬금없이 나를 원망하는 말을 했다. 그말에 나는 무척 놀랐다. 그리고 언성이 높아지며 그녀를 다그쳤다. 나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녀는 순간 움찔하며 다시 말문을 닫으려고 했다.
 


"아니...아니... 미안하다. 혜지야... 선생님이 화난게 아니라... 당황해서 그런거다... 다시는 화 안낼께...
그리고 니말 안 끊을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계속얘기해봐라..."
 


"훌쩍... 훌쩍... 선생님...!... 왜 그렇게... 그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아....!" 

"전... 정말... 꿈에라도... 흑흑... 선생님이... 결혼했을 줄 몰랐어요... 어떻게 대학도 졸업하기전에... 결혼하실 수 있어요...
그것도... 이사장님 딸이랑.... 흑흑"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혜지의 그 말에 나는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사장님이 선생님의 장모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전... 세상이 무너지는줄 알았어요... 그리고 교실로 들어왔는데...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않아서... 도저히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죠... 그래서... 반장에게 말해서... 체육 수업을
빠진채... 혼자 남은 교실에서 계속 울고 있었던 거에요... 울면서... 생각하니... 그렇게 일찍... 결혼한... 선생님이 점점 더
밉게 느껴졌어요... 흑흑흑... 난 몰라... 저는... 저는... 그런줄도... 모르고... 흑흑흑."
 


혜지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혜지는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또 다시 우리는 일체의 대화을 중단한채 침묵으로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침내 말없이 흐느끼던 혜지는 조금 진정 되었는지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훌쩍... 선생님을 처음 본 순간... 저는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저는... 선생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선생님...
주변을 맴돌았고... 선생님을 만나러... 학교에 오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급기야... 오늘은... 내 맘을...
고백하려고.. 다른 애들.. 오기전에.. 학교에 일찍 왔었고.. 예상대로 선생님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 


대꾸도 하지않은채 혜지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울음을 그쳤는지 혜지는 손수건을 꼭 쥔 채 가끔씩 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혼했다는... 선생님의 말에...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죠... 선생님...
나 어떡하면 좋아요? 머리에서는... 안된다... 안된다... 수 십 번을 되새기며... 다짐했는데... 그게... 이 가슴이... 이 가슴이...
뜻대로 되지 않아요... 선생님께... 고백해서... 내 마음을 받아들여 주면...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
이제는 외롭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으니... 그래서 속상해서 울었어요."
 


"......." 


혜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또 다시 죄없는 가슴을 움켜쥐었고 두 눈을 치켜 떴다가 찡그렸다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울먹이며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나는 어떤 위로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너무... 외로웠어요... 저에겐... 자상한 아빠처럼... 제가 투정을 부리면... 언제나 웃으면서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어요... 선생님의 든든하고 자상한 모습에... 저는 그 사람이 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선생님과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선생님을... 그렇게... 일찍... 가로채간... 부인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어요..."
 


이제 혜지는 격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자신의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빠같이 언제나... 내 편이 되어서... 나의 외로움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이젠
그런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었어요... 엉엉엉.. 날 남겨두고... 하늘 나라에 가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흐흑흑!!!"
 


"흐...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늘 나라로 가신 엄마 라니? 분명 혜지에게는 부모님이 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혜지에게 물었다.


"넌 분명 부모님이 계신다고 하지않았나?" 

"훌쩍... 네... 그랬어요... 저에겐... 분명 부모님이 있어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데... 어떻게...?" 

"원수같은... 아빠가 있긴해요...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친 딸인 우리들을 마치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그런... 파렴치한 아빠가 있긴 해요...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애정도... 남아있지 않은... 나를 낳아준...
그런 아빠가 있어요..."
 


"......." 

"그런 아빠에게 헌신하고... 순종했던 엄마는... 2년 전 겨울 어느 날... 암으로 돌아가셨죠... 아마 엄마가 암에 걸린 이유도...
아빠 때문일 거에요."
 


"그게 무슨 말이고?" 

"흑흑... 제겐 저하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언니가 하나 있어요... 아빠는 그 언니를 부잣집에... 억지로 시집보내버렸고...
거기서 너무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어요... 형부는 처음에... 언니의 미모에 반했던지... 언니에게 갖은 정성을 다했대요...
그러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이 180도 달라졌대요... 언니의 모든 생활을 통제했고... 어쩌다 가끔 집에 들어와서는...
갖은 트집을 잡아... 언니를 학대했고... 심지어 언니에게 손찌검도 했대요... 처음에는 그런줄 몰랐던 엄마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되었고... 그날도 형부에게... 얻어터져서... 병원에 입원한... 언니에게서 모든 사실을 알게되었어요... 그 얘기를
듣게된 엄마는... 불행한 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결혼을 말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죠...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인
아빠에게는 내색도 못한채... 바보 같이 모든 불행이.. 자기탓이라 한탄하며.. 속으로.. 가슴앓이했고.. 그게 모두 병이되어...
급기야... 암이되었던거 같아요... 흑흑흑..."
 


"흐흑... 흐으흑... 흑흑흑..." 


혜지는 또다시 엄마 생각에 설움이 북받쳤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뛰어들다시피 내 품에 안기며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달려든 그녀를 엉겹결에 안았고 아무런 말도 하지못한채 등만 토닥여 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그렇게 모였는지
제법 많은 차들이 들어와 있었다.
 


"엉엉엉... 그사람은 아빠도 아니에요... 짐승이에요... 악마에요... 엄마가 돌아가시자... 1년도 안돼서... 기다렸다는듯이...
언니 또래의 젊은 여자를 데려와서는... 저에게 새엄마라며 소개하지 뭐에요... 저에게 그 여자를 엄마로 받아...
달라는 말을 했어요.. 그순간.. 저는 치를 떨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빠에요... 흑흑..."
 

그 장면에서 혜지는 아빠에게 묻어나는 증오 만큼 나의 가슴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라는 명칭은 어느새
사무친 원망만큼 '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에게... 그럴 수 없다고... 당신이 사람이냐고... 엄마에게 미안하지도 않냐고...
단호하게 얘기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거에요... 저는 그 길로 집을 나왔어요... 그리고 혼자된
언니에게 갔죠... 내 말을 들은 언니도... 저만큼 울었어요... 언니는 곧바로 그 사람에게 전화해서... 더이상 우리 자매를 찾지
말라는 통보를 했고... 그 길로 자기 집 근처... 자그마한 아파트를 얻어줬죠... 거기서 저는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어요...
하늘 나라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엄마... 엉엉엉... 흑흑흑... 나 어떡해..."
 


그동안 감추어왔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듯. 혜지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더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내 품을 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 저... 너무 외로웠어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난파된 사람처럼... 무서웠어요... 흐흐흑... 이런 나를 무인도에서
구해내줄... 사람이 선생님인줄 알았어요... 흑흑..."
 


시작한 혜지의 하소연은 눈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만큼 계속되었다. 


"정말... 그러던 어느날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나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희망을 발견했어요...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죠... 뛰는 가슴을... 아무리 진정시키려고 해도 더이상 진정시킬 수 없었고...
급기야...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을 찾았던 거죠... 어느새 그는... 내 마음 모두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런 나의 마음은 매일... 아니... 매시간, 매초, 매순간 그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죠..."
 


"......." 


"매일 학교에 오면 그를 볼 수 있다는 기대로... 마냥 들떠있었고, 그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온 밤을 지새웠고... 학교에서
그를 본 순간 이젠 혼자가 아니라는... 만족감을 느꼈어요... 우울하던 내 모습도 그 사람 앞에서 만큼은 밝아졌고, 내게
보내는 그 사람의 미소 또한 지금까지의 외로움을 한방에 날려버렸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의 허락도
받지않은채... 마음 속으로 동경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마침내... 동경하던 나의 마음은... 사랑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 사람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말에요..."
 


"......."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더이상...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니... 선생님이... 미워...!" 


혜지는 나를 원망하는 말을 끝으로 길고 긴 자신에 관한 얘기를 모두 쏟아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다듣고는 한동안
할말을 잃었다. 
사무치는 외로움과 함께 꾸고 싶지않은 악몽과 같은 나날을 지내온 혜지가 너무도 불쌍해서 울고싶었지만,
대놓고 울지는 못했지만. 눈물 한방울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른 손으로 눈물을 감춘후 나는 혜지를 품에서 떼어냈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예쁜 눈을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혜지야. 그랬었구나... 그런 외로움에도 항상 밝은 모습을 간직한 니가 너무나 대견하다... 힘내라... 이제부터는 좋은 일만
생길거야. 그럴거야. 희망을 가져라."
 


"그렇지만... 그렇지만... 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어떻게 할까?" 

"......." 

"너의 애인은 되어주진 못하겠지만...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어떡할까?" 

"그러면 제 오빠가 돼주세요... 나를 친동생 처럼 보살펴주는... 그런... 그런... 친오빠가 되어주세요..." 

"그렇나. 내가... 그러면 되겠나?" 

"그래요.. 전 더 이상은 바라지 않을께요.. 나를 지배하며.. 저의 과거를 암흑으로 물들였던.. 아빠에 대한 씻기 힘든 원망에서
제가 빠져나올 수 있게 제 오빠가 돼주세요...!!!"
 


"그럴께. 그렇게 하자...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오빠하고 한번 불러봐..." 

"고마워요. 선생님... 아니... 오빠..." 

"이젠 더이상 울지말고... 예전 같이 웃는 혜지의 모습을 보여줘." 

"네... 아니... 응... 노력할께... 오빠!!!" 


나는 혜지에게 애인은 못되어주지만 대신 오빠가 되어주겠노라고 약속했고, 그녀는 나의 허락에 고마워했다. 


"혜지야." 

"네!" 


시계를 보니 8시를 넘기고 있었다. 


"집이 어디고? 벌써 시간이 8시다. 저녁은 먹었나?" 

"어머... 벌써... 그렇네! 응... 오빠... 난 보충수업 받기전에 먹었는데... 오빤 안먹었어?" 

"응!!!" 

"저런!!! 미안해서 어쩌나..." 

"또 그란다... 앞으로 오빠에게는 미안하다는 소리하지 마라... 그리고 난 괜찮다... 이따 집에서 먹을 께... 알겠제." 

"그래도...!!!" 

"괜찮다니까. 한끼 쯤은 괜찮다... 내일 일찍 학교도 가야하니까... 우리 못한 얘기는 내일 학교에서 하도록 하자."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나의 말에 혜지는 계속해서 미안해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혜지를 안심시켰다. 그말과 함께 나는
자동차에 시동 걸었다. 그런 다음 곧장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왔고, 혜지가 안내하는대로 그녀가 살고있다는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혜지야. 오빠간다. 자주 들릴 테니까 혼자산다고 밥 굶고 아무렇게나 생활하면 혼난다.. 알았제." 

"알았어... 오빠... 헤헤!!!" 

"그래.. 우리 혜지는 웃는 모습이 너무 이쁘다... 그렇게 활짝 웃어라... 힘내고... 이제 오빠가 힘이 되어줄께." 

"고마워... 오빠... 사고 안나게 조심해서 가!!!" 

"그래... 오빠 간다... 내일보자." 


주차장을 나와서 10분 쯤 가니 혜지가 산다는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엘리베이트 앞 까지 바래다준 후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웃음지으며 나를 배웅하는 혜지는 두 눈이 상당히 부어있었다.
 


"군오빠... 힘들었지?" 

"하루종일 잘있었나? 몸은 불편한데 없고?" 

"응... 없어... 저녁은 먹었어? 안먹었으면 지금 밥상 차릴께." 


현관에 들어서니 경인이가 밝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하루종일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경인이는 물만난 고기처럼
들뜬 목소리로 나에게 식사유무를 물어왔다.
 


"나 무척 배고프거든... 빨리 밥 좀 줘." 

"알았어... 밥 차릴동안 얼른 씻고 와...!!!"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와 차가 있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대로변에서 들려오는 낯선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촌스럽지는 않지만 짙은 화장을 한 김선경 선생이 손짖과
더불어 밝게 웃음띤 얼굴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려의 문신 김부식이 백제 미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화이불치(華而不侈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했던가!' 

그녀의 모습을 보니 문득 이 말이 떠올랐다. 지금 내 눈앞에 비춰지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4글자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이 말이 가장 적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호호... 여기에요..." 

"어떻게 여기에...??" 


어리둥절한 내 모습과는 달리 선경은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놀란 내 모습을 보고 재밌다는듯
장난어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선경의 그런 모습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날리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호호호호... 많이 놀라셨나요?" 

"네... 허... 이것 참... 오랜만이네요. 김선경 선생님. 이런데서 뵙게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쩜! 제 이름 기억하고 계시네요!!" 

"아...! 네...! 우리 경인이 담당 의사선생님인데...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죠... 선생님. 잘지내고 계셨습니까?" 

"예... 보시다시피 저는 잘지내고 있어요... 선군씨도 그동안 잘 지냈나요? 경인씨는 병원에서 가끔씩 보는데...!!" 

"네! 저도 잘지내고 있습니다. 교생 실습도 끝났고, 이제 학창 시절을 마무리짓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왠일로
학교에 오셨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록 교정이었지만 차들의 통행이 빈번한 길 가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빵...빵..." 

"어머나...!!!" 

"선생님 여기로...!!!" 


그때 갑자기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선경은 내 쪽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얼떨결에 나는 인도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몸을 피하는 선경을 끌어당겨 안았다. 
비록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차가 지나가고 난 후에서야 정신을
수습하고보니 선경은 내 품에 꼭안겨 있었고,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선경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멋쩍은 표정으로 떨어졌고, 떨어지는 선경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홍당무가 되어있었다.


"선군씨...!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아뇨... 괜찮습니다...!!" 


급히 정신을 수습한 것인지 선경은 나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나는 그녀에게 괘념치말라는 말을 했고, 속으로는 교정에서
그렇게 급히 차를 몬 사람을 욕하고 있었다.
 


"선군씨..." 

"예?" 

"제가 오늘 학교에 온 이유는 바로... 선군씨를 만나기 위해 왔어요... 왜냐하면...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거든요." 

"......." 

"학교에 와서..... 전에 선군씨가 가르쳐 준 삐삐로 연락드릴려고 했는데..... 저기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여서 선군씨를
불렀던 거에요."
 


"그렇습니까." 

"멀리서인데도 선군씨의 모습은 금방 눈에 띠였어요... 큰 키에 우람한 체구가 말이에요... 호호호호" 

"하하하하... 그랬습니까? 제 체격이 좀 큰 편이죠." 


금방 화색을 띤 선경은 용무가 있어서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선군씨.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그런데 선경은 갑자기 간절함이 짙게 배어있는 표정을 짓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부탁이 있음을 얘기했다. 

'무슨 부탁이기에 이렇게 두서없이 부탁을 하는가?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선경의 갑작스러운 말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여성 앞에서는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나는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미안해요... 제가 밑도 끝도 없이... 실수를 했네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나의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던지. 선경은 사과를 했다. 


"선군씨... 시간있으세요... 우리 이럴게 아니라...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을래요? 제가 부탁할 것도 있고 해서요." 

"예... 그러죠... 차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뇨... 전 아직 차가 없어요.. 아직 운전 면허를 못땄거든요... 그래서 아직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답니다. 호호호"
"그렇습니까? 잘됐네요... 그러면 제 차로 가시죠..." 

"어머... 선군씨는 차 있으세요?" 

"네... 장모님께서 뽑아주셨어요... 요즘 그걸타고 등하교를 하고있습니다..." 

"와! 멋져요... 나중에 선군씨께 운전 좀 가르쳐달라고 해야겠네! 나중에 운전 좀 가르쳐 주세요... 헤헤!!" 

"네... 알겠습니다...!" 

"와! 좋아라!! 호호호호" 

"선생님! 그럼 절 따라 오세요..." 


나는 선경의 부탁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녀의 저녁 식사 제의를 승낙했고, 차가 주차되어있는 주차장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선경은 엷은 미소와 함께 그 자리에 몸을 실었다. 곧바로 우리는
그녀가 자주찾는다는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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