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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멈추지 않는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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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9가이드
댓글 0건 조회 2,983회 작성일 24-06-05 20:23

본문

눈 송이가 떨어지고 있다. 하얀 눈 송이를 보는 지선의 얼굴에 아주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승용차 앞 유리창의 풍경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상민은 그녀의 행복한 미소에 만족스러웠다. 
멀리 계곡 사이를 향해서
펼쳐진 도로 끝의 어딘가에는 현실을 떠난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릴 것 같은 지선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도로변에 수문장처럼
서있는 가로수의 나뭇가지에는 하얀 눈 꽃송이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지선은 다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니는 기분이었다. 
드라이브를 하고 서울로 돌아온 상민은 지선을 데리고 백화점에
들어갔다. 송이를 가슴에 안고 에스컬레이터를 탄 상민은 지선의 허리를 껴안고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지선의 눈동자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눈 웃음이 깃든 지선의 얼굴은 요즘들어 한층 밝아 보이고 피부가 피어나서 더욱 젊게 보였다.
 

액세서리 점포 앞을 지나치던 상민이 진열장 안의 목걸이들을 바라본다. 진열장 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매화꽃 송이
모양의 페넌트가 달린 수정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슴지 않고 여점원에게 가격을 물어보고 달라고 한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상민은 카드를 꺼내 지불한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선의 목에 걸어주었다. 얼떨결에 목걸이를 걸친
지선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이걸 왜.......!?......................................” 

“꼭... 걸어 주고 싶었거든...............................”


상민은 흐뭇한 표정으로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지선에게 아주 특별한 애정의 표시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선은 결혼 패물을 받아 본 이후에 남자에게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울컥하는 감정이 마구 솟아오르는 지선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상민의 마음을 느끼는 지선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시하고 싶었다.
여점원이 상민의 가슴에 안긴 송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어머!... 아기가 엄마 닮아서 너무 예쁘네요... 눈은 서글서글한 아빠 닮았나 봐요...........................” 

“업... 빠... 업빠.....................................”


방긋거리는 송이가 대답이라도 하듯이 말을 했다. 지선이 가르쳤는지 송이가 오빠라는 발음을 서툴게 흘린 것이다. 쑥스러운
표정을 하는 상민과 시선이 마주친 지선의 얼굴이 붉어졌다. 액세서리 점포를 벗어나서 상민이 한 팔로 지선의 허리를 껴안아
당겼다. 이제 상민의 연인 같은 행동에 익숙해진 지선이었다. 상민이 빙그레 웃으며 귓속말을 했다.
 

“봐!... 다른 사람들도 송이가 날 닮았다고 하잖아...........................” 

“까불고 있어..........................”


지선이 들고 있던 손가방으로 상민의 가슴을 쳤다. 부끄러워하는 지선의 표정을 보는 상민은 그래도 즐겁기만 하였다. 얼굴을
붉히지만 지선은 싫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동안의 한정된 시간이지만 지선은 상민의 애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듬직한
체격의 상민과 앳되어 보이는 지선이기에 누구나 그들을 다정한 부부로 보는데 의심치 않았다.

남녀 사이에 행복이란 말보다는 감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 눈빛만 보아도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서로가 기다려지고 보고 싶은 것이고, 두려움보다는 가슴을 열고 속삭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존재한다. 
한해가 저물고 또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한해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지나간 한 해의 고통보다는 새로운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한다. 희망이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에 시작된다.
희망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느낄 때 봄을 맞이하는 새싹처럼 피어난다. 
지선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고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골목길의 나무 가지에 싹이 움트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봄이 오려나보다. 요즘 너무 한가롭다는 것을 지선은 느낀다. 생활비도 상민이 도와
주고 있어 소품을 만들지 않고 있어 그녀는 시간의 여유가 많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또 다른 희망에 부푼다고 하지만 지선은 자신의 희망이 무엇인지 막연하다. 희망이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늘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있을 때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막연하게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남편에게 애정을 느낄 수도 없고 내일의 삶이 불안한 그녀에게 뚜렷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상민의 애정과 남편의 무관심 사이에 있는 지선은 고통스러운 시간인지 모른다. 다만 마음이나마 그녀가 의지 할 수
있는 상민이 있어 고통스러움을 잊을 수 있다. 
햇살이 따스한 정오에 집안 청소를 하던 지선은 소파에 앉아 상민의 방을 바라
본다. 대학의 수시 입학에 합격한 상민은 강의를 받으러 캠퍼스로 가고 없었다. 들고 있던 청소기를 집어 던진 지선은 양 팔로
무릎을 끌어안는다. 양손으로 눈을 가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고민에 빠져 있다.
 

취업을 하려고 다니던 남편이 드디어 직장을 구했다는 말에 반가워야할 지선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일주일 전이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온 남편을 보고 지선은 긴장이 되었다. 평상시와 다르게 희색이 떠오른 남편의 얼굴을
보고 지선은 의아하게 느꼈다. 송이를 안고 있는 지선에게 남편이 불쑥 무뚝뚝하게 말했다.
 

“포항에 선박 만드는 조선회사에 취직이 됐으니... 내려갈 준비해.............................” 

“뭐라고요.......!? 집은 어떻게 하고요?..............................”

“거기 직원 사택이 있으니 잘됐어... 집은 정리해서 은행부채를 갚아야지...................................”

“네.........!?...................................”


남편의 갑작스런 말을 듣는 순간 지선은 멍하니 넋을 잃었었다. 물론 남편이 취업을 하길 바랐던 그녀였다. 그러나 포항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상민의 곁을 아주 떠난다는 것이다. 상민이 어떻게 받아 드릴지 과연 상민을 떠날 수 있는지 집을 정리하면
상민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쨌든 복덕방에 집을 내놓기는 했으나 혼란스러운 지선은 상민에게 아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쩌면 짧지 않은 시간동안 상민의 눈빛 속에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는 그동안 상민이 얼마나 안식처가 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상민의 여자가 된다는 것도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이지만
그녀는 상민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더욱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다. 물론 감정에 휘말려 허물 수 없는 벽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서로의 애정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상민의 곁을 떠나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 자신을 되돌아
보며 그만큼 상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것을 지선은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런 지선의 마음을 모르는 상민은 날이 갈수록 깊은 애정을 표시한다. 포항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다정하게 대하는 상민이 두려워진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지선은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상민에게 말할 수
없다. 
갈등에 쌓인 지선의 하루는 지옥 같다.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거실 유리창에 흘러내리고 있다. 요즘 소품을 만들지
않기에 은주 엄마가 찾아오는 것도 뜸해졌다. 남편은 희망으로 가득하지만 생동감을 잃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집안 일을
한다. 어떤 마음의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핏기마저 사라졌다.

안방에서 잠들었던 송이가 깨어나서 거실로 기어 나온다. 
송이를 안아서 올린 지선은 힘없이 소파에 앉는다. 송이가 상민을
닮았다고 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 올려진다. 현관의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상민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지선은 아주
반가움과 두려움이 엇갈렸다. 송이를 안고 액정화면을 들여다본다. 상민이 아니고 낯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세요?...................................” 

“복덕방에서 왔습니다.....................................”


공연히 지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관문을 열어주니 젊은 남녀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지선은
비로소 복덕방에 집을 내놓은 것을 의식했다. 복덕방 노인의 얼굴에는 지나간 세월만큼 주름이 깊어 보였다. 노인이 지선에게
직업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 내 노셨지요?....................................” 

“네............................................”


두 남녀의 시선이 현관문 안의 집안으로 향한다. 집을 내놓기는 했으나 지선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간직하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심정이었다. 습관적으로 말투를 흘리는 노인은 당연한 것처럼 현관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젊은 남녀에게
손짓해서 안내한다.
 

“들어가 보세요... 거실 창문이 남향이고 북쪽의 주방에서 공원이 보여 좋습니다..........................” 

“실례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젊은 남녀가 거실로 들어선다. 그들이 방과 세면장 그리고 방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젊은 남녀에게 복덕방
노인은 묻지도 않는 말들로 설명을 한다.
 

“집도 깨끗하고 신혼부부가 살기에 아주 좋습니다... 요즘 이런 집을 구하기도 힘들지요.......................” 


방마다 유심히 살피는 젊은 남녀는 무척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지선은 상민의 방을 살피는 그들에게 숨겨진 비밀을 들여다
보는 것만 같았다. 젊은 남녀는 들여다 본 방을 다시 보면서 세심하게 살폈다. 젊은 여자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깨끗하고 아담해서 좋지?..............................” 

“나도 좋지만 자기 마음에 들면 되지... 뭐.....................................”


젊은 남녀는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흘렸다. 지선은 마주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몇 번인가
거듭해서 집안을 살펴보며 머뭇거리던 그들과 복덕방 노인이 갔다. 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지만 그래도 희망에 부풀어
남편과 집을 보러 다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막상 정들었던 집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지선은 서운함에 젖는다. 그녀는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자신의 손때가 묻은 집안을 서성거렸다. 30분 가량 지나고 전화벨이 울렸다. 특별하게 전화가 걸려올
곳이 없는 지선은 송이가 깰 것이 두려워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송이네 집입니다...................................” 

“조금 전에 집을 보고 간 복덕방입니다...............................”

“아~!... 네.........................................”

“집을 보고 간 사람들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군요..................................”

“네.....................................”

“그런데........ 신혼살림을 차리기에 돈이 모자란다고 깎아 줬으면 하는데...........................”

“그건 저도 사용할 때가 있어 곤란해요..............................”

“요즘 부동산 시세가 들쑥날쑥해서 이사철에 얼른 작자가 있을 때 팔아야 합니다.......................”

“어쨌든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럼... 할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지요.....................................”


전화기를 내려놓는 지선은 긴장이 되었다. 어쩌면 대책 없으면서 집이 팔리지 않았으면 하는 미음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송이를 데리고 낯선 곳에 가서 남편과의 삭막한 생활을 상상한다.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 같은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온 몸의
맥박이 멈추며 힘이 빠졌다. 그러나 십분도 안 돼서 계약을 하자는 부동산의 연락이 왔다. 
평상시 남편과 자주 전화연락을
하지 않았던 지선이지만 남편에게 전화로 했다.

내용을 말했더니 남편은 얼른 계약을 하지 전화를 거느냐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송이를 안고 부동산으로 가는 지선은 어딘가
쫓겨나는 심정이었다. 부동산에서 젊은 남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격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에 한 달이내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 남편을 대신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지선의 손이 떨렸다. 
집으로 돌아온 지선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더욱
긴장이 되었다. 이제는 상민에게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상민을 기다리는 지선의 마음은 바늘 방석에 앉은 심정이다. 스스로 침착하고 냉정해져야 한다면서 지선은 다른 집의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란다. 드디어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송이를 안고 일어선 지선은 액정화면을 들여다봤다. 상민이 틀림
없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냉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짐한 지선은 현관문 스위치를 누르고 소파에
앉는다. 환한 미소로 집안으로 들어온 상민이 평상시나 다름없이 지선의 옆에 와서 앉았다. 그녀는 상민에게 시선도 안주고
송이만을 내려다봤다.
 

“우리 송이 엄마하고 잘 놀았어!..............................” 

“업... 빠!... 어... 빠..............................”


천진난만한 송이는 방긋거리며 상민에게 팔을 벌린다. 상민은 송이를 끌어안으며 흔들었다. ‘침착해야 돼... 난 지금 조카를
대하고 있을 뿐이야. 냉정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는 지선이지만 숨을 쉴 수가 없다. 지선은 상민의 훈훈한 체취가 다른
날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상민은 왠지 창백해 보이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런데... 왜 힘들어 보여?........................................”


상민이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지선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상민의 팔을 밀어냈다. 상민은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지선의 차가운 표정에 당황스러웠다. 외면하고 있지만 상민의 눈빛을 의식하는 지선은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그리고 감정이 없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외삼촌이 포항에 있는 직장에 취직이 됐어... 집도 팔기로 계약했고.............................” 

“포항........!?...................................”


갑작스런 외숙모의 말에 상민은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심정이었다. 깊어가는 애정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던 상민은 그녀와
이별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상민은 너무 현실을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외삼촌의 취직을 축하해 주어야 마땅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상민은 눈앞이 캄캄했다. 
창문으로 시선을 향한 지선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상민도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간 상민은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얼마 전부터 인가 외숙모 지선의 얼굴에 왠지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보였던 이유를 상민은 알 수 있었다. 싸늘하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냉정하게 변할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민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여자의 본능에 비해서
남자가 너무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최초 애인이고 여자의 모든 것을 원하지만 어리석은 허영심이고 여자는 빈틈없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여자가 언제나 바라는 것은 남자의 마지막 애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각자의 생각에 빠진 상민과 지선 침묵에 빠져 들었다.
지선의 진심을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상민은 방안을 맴돌다가 거실로 나갔다. 지선은 세탁을 정리하고 있었고 혼자 재롱을
부리고 있던 송이가 상민을 향해 바닥을 기어왔다.

송이를 안은 상민이 소파에 앉아 세탁을 정리하는 지선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상민이 어떤 말로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
머뭇거렸다. 그러나 세탁물 정리를 끝낸 지선이 상민의 가슴에 있는 송이를 슬그머니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민은
스쳐가는 그녀에게서 찬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의식했다. 고양이는 아홉 개의 목숨을 지녔고 여자는 아홉 마리 고양이 목숨을
지녔다는 말을 떠올리는 상민은 고개를 저어 부정한다.

그동안 허물 수 없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은밀한 사랑에 깊이 빠졌던 시간이었다. 비록 주위의 시선이 두려웠으나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간이 하루아침에 집안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썰렁해졌다. 
지선의 태도 변화에 실망스러운 상민은 며칠 동안을
고민했다. 혼자서 각가지 생각을 하던 상민은 가슴이 저리고 아프지만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외숙모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의 애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지선은 상민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감정을 들어낼 수 없어 침묵하는 상민과 지선의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술을 잘 마시지 않던 상민이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지선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로웠다.

그녀로서는 어떤 때보다도 힘겨운 한 주일이었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지선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편을 묵묵히 맞이했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귀가한 경호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아내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소파에 앉아 아내의 표정을 살피는 경호는 남편으로서의 관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송이를 슬그머니 들어서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보자!... 우리 송이 많이 컸네...................................” 


지선은 평상시 보지 못하던 남편의 행동을 힐끔 바라봤다. 송이의 재롱을 바라보던 경호는 소파에 앉아 세탁물을 정리하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면장에서 나온 상민은 외삼촌에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상민의
방문을 바라보던 경호가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다.
 

“상민이한테... 포항 내려간다고 말한 거야?.................................” 

“..................................”


지선은 대답도 하지 않고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경호는 아주 짜증이 났다.
이맛 살을 마구 찌푸린 경호는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그가 직접 상민의 어머니인 큰 누나에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채를 값아 주던 누나에게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 숨을 내쉰 경호는 상민의 방문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상민아!... 뭐하니?.....................................” 

“네~!...........................”


그렇지 않아도 거실의 동태에 민감하던 상민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상민은 외삼촌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지선을 의식하며
침체된 분위기를 느꼈다. 올려다보는 외삼촌의 날카로운 시선에 상민은 잠시 주춤거렸다.
 

“무슨 할 말이 있으세요?............................” 

“외숙모가 말하지 않았니?.................................”

“무슨 말인지....................................”

“내가 취직이 돼서 포항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아!... 그 말 들었어요...........................”

“너는 어쩔 셈이냐?..................................”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어요... 전세방을 얻어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어머니가 다른 말 안하시더냐?................................”


“별다른 말씀은 없고... 취업이 되셨으니 잘 됐다고 하시더군요..............................”

“내가... 계속 편리를 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해해... 주니 고맙다......................................”


아주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한 상민의 시선이 외삼촌의 가슴에 안긴 송이를 향한다. 그리고 송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빙긋이
웃는다. 경호는 떳떳하게 말하고 축하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상민에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그는 왠지 열등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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