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이야기 - 14편 > 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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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아르바이트 이야기 -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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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9가이드
댓글 0건 조회 19,821회 작성일 23-02-13 18:59

본문

그때 현관문이 삐리릭 소리를 내고 열리면서 지혜가 안으로 들어선다.
 

"여신 왔지롱... 헤헤.............."
 

지혜는 나를 보자마자 내 뺌을 양손으로 잡고 입술을 빨았다. 쪽쪽하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났다. 한참동안 내 입술을
빨던 지혜가 내게 안겨왔다. 
나는 지혜를 꼬옥 안았다. 마치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느낌이다. 이렇게
지혜를 안을수 있어서 너무 고맙다.
 

"여기서 기다린다더니?............"

"어이구우... 그래쩌여?... 내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다고... 만나던 여자도 그냥 내팽개치고 언능 왔쩌여?............"
"야아아!... 안그랬거든............"
"하하... 알았어... 쪼끔 오바했더니 왜 이렇게 버러럭이야?... 나.. 여기서 오빠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가느라고 내려갔었어... 

 오빠도 지금 화장실에 들어갈 자세네?... 하하................"


"이 화장실 그냥 쓰지... 화장실 간다고 내려가?.........."

"에혀... 여자는 화장실에서 하는 일이 좀 복잡해... 오빠한테는 없는 것도 있고......."

"그럼... 걍 패쓰... 나 샤워한다............"
 

나는 샤워를 하고 지난 번처럼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으려고 바로 옷방으로 갔다. 지혜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TV에
열심인지 엄청 조용하다. 
지혜가 이렇게 조용한 것이 나에게는 낯설다. 테이블에는 영어 단어장과 연습장이 놓여있다.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로 왔어?......."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있다가.. 갔다가.. 다시 온건데?..............."

"그니까... 무슨 일이냐고?..........."

"나에게 상담이 필요해..........."

"여신에게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해줘야지...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거야?.............."

"지금 시간이 몇시인데?............"

"자기가 이제 들어와놓고 왜 나한테 뒤집어 씌운대?............"

"뭐?............" 

"맞잖아?... 난 한시간 전에 이 방에서 오빠랑 통화했고... 쭈욱 여기 있었거든요?.........."

"한시간 전도 벌써 밤 11시 넘었었는데?..........."

"난 8시부터 계속 오르락 내리락 했거든요... 내 다리통 굵어지면 오빠 책임이야............"

"이러언... 그래... 무슨 상담이 필요해?............."

"고민 상담............."

"고민?... 여신한테도 고민이 있어?... 말해봐............."

"첫번째 고민은... 와인!..............."


"요게... 쪼끄만게 왜 이렇게 술을 좋아해?..........."

"원래는 아니었는데... 오빠한테서 술냄새가 솔솔 나니까... 갑자기 쫙 땡기네... 헤헤..........."

"나야... 친구들이랑 있다보니까 마신거고... 넌 아직 고딩인데 허구헌날 술타령이야?..........."

"살다보면 땡기는 날이 있거든?... 그게 바로 오늘이야............."

"요새 매일 땡기더만?... 땡긴다고 바로바로 마셔대면 중독 돼요........."

"딱 오늘만 마시고 이번 주 내내 입에도 안댈꺼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아아... 지인짜아... 와인 한잔으로 엄청 치사하게 나오네..............."
 

지혜가 버러럭 했다. 그런데 버럭럭 하는 지혜에게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보면 볼수록 하는 짓마다 매력덩어리이다.
지혜에게는 섣불리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와인병을 꺼내고 바로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혜는 나를 보고 있다가 잔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안주로 먹을 것도 주섬주섬 꺼낸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마실 생각이었으나 지혜는 소파로 옮겼다. 내가 잔에 와인을 따르려고 하자 지혜는 자기가 따르겠다며
와인병을 손에 든다. 
지혜가 조심스럽게 와인을 따르는 모습이 엄청 진지해보인다. 그러니까 또 얘가 엄청 귀엽다.
 

"와인이 준비됐으니까... 첫번째 고민은 해결 됐고... 그 다음 고민은?........."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뭐가 해결 됐다는 거야?............"
 

우리는 허공에서 잔을 부딪힌다. 지혜의 입으로 와인 한 모금이 들어간다.
 

"아오오........ 셔!.........." 

"그렇게 신 것이 뭐가 좋다고 자꾸 마셔?..............."

"치이... 자기도 마시면서..........."

"나는 신 맛이 좋거든... 그래... 이제 마셨으니까 고민이나 말해봐..........."

"오빠... 나... 공부하면 정말로 전망이 있을까?.........."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너한테 수업을 할 것 같아?... 되지도 않을 애를 돈 벌 목적으로 공부시키지는 않거든요....."
"으음............." 

"내년에 고3이 되면 대학에 갈 준비를 해야하거든... 그 때는 공부할 시간도 별로 없어........."

"무슨 준비?............."

"여기 저기 진학상담 받고... 대학 찾아서 수시 원서 쓰고... 생활기록부 작성하고... 등등..........."

"그럼... 고2때 공부를 해 두라 이 말씀이셔?........."


"그래... 지금 공부하는 것도 지혜한테는 딱히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야.. 미리 놀고... 이제 공부하려고 덤비니까... 만일
 거꾸로라면 어땠겠어?........."
 

"고1때 열공... 고2때 방황?............"
 

"그래... 그랬다면 완전 망하는 거죠... 고3때 만회가 될 것 같으니?... 고3은 고2때 배운 것을 복습하는 정도만 하거든...
 한두가지 빼고..............."


"오빠 말을 듣고 있으면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돼!.. 될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되게 돼 있어............."

"그런데 이 불안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야?................"

"글쎄.. 공부 안하고 놀았다는 자책감?... 새로 배우는 것들이 어렵게 느껴지고...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
"지은 죄가 많다 이거야?............" 


"죄는 무슨?... 놀때 놀았으면... 공부할 때 빡씨게 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너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이건 완전히
 지혜답지 않거든?............"
 

"아아... 그거?... 영어 숙제가 이번 주에 단어장 외우는거야.............."

"그럼... 외우면 되지.................."
 

"그게 외워서 될 것이 아니야... 이 단어장에 1800단어가 들어있는데 영어샘이 이번 주에 900 단어... 다음 주에 900 단어를
 외워서 
깔끔하게 정리하잰다..........."
 

"그대로 외우면 안돼?............." 


"900단어를 1주일 동안에 외운다고?.. 내가 다른 과목 전부 손 놓고 단어만 외워도 안돼.. 오늘 외운다고 해도 2, 3일 지나면
 또 까먹고... 
900단어가 애들 장난하는 것이 아니잖아?............"
 

"지혜야............" 

"응?............."

"그러니까 너는 단어 외우다가 꼭지 돌았구나?............."

"별 이상망칙한 단어들이 엄청 많고............"

"그 숙제는 너를 위한 숙제가 아니라... 영어 잘하는 애들을 위한 숙제 같다..........."

"그런 것도 있어?................"


"영어 잘하는 애들을 생각해봐... 걔네들은 그거 봐도, 아는 것이 많으니까... 외워야 할 단어들이 별로 많지 않거든... 너는
 그 동안 그런 쪽으로 신경을 안썼으니까 
대부분이 모르는 단어이고 또 그 많은 단어들을 싸그리 다 외워야 하는 입장이고..."
 

"그니까... 쫌 놀다가 공부하려고 덤볐더니 단어가 발목을 잡잖아........"
"그거 다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외우는 데 까지 외우고... 부지런히 복습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럼... 숙제를 다 못하는데?.............."


"그 단어 숙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마세요.. 너는 포기하지 말고 하는 데 까지만 해요... 그 단어를 모조리 다 외웠다고
 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왜?... 단어를 많이 알면 영어를 잘하는 것 아냐?......." 

"영어가 단어뿐이냐?... 문법이나 어법은 어쩌고?.. 지문 독해는 또 어쩐대?................."

"하긴............"

"지혜야.. 너는 여신이잖아? 그런 고민은 하지말고 나랑 같이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나를 믿고 따라와주면 안되겠니?"

".............."
 

지혜는 아주 조용히 와인을 마신다. 이러는 지혜가 내 눈에 한없이 딱해보인다. 내 가슴이 먹먹할 정도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지혜의 그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야..........." 

"아니야... 오빠는 내 마음을 몰라... 몰라도 한참 몰라............"
 

"지혜가 아무리 결심을 암팡지게 하고 첫발을 내디뎠다고 해도 순풍에 돗달기는 불가능해... 바다에 어떻게 순풍만 있겠니?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그 결심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순간이 여러번 올 꺼야... 때로는 이것이 해서 될 일인가
 아주 의심스럽고... 
때로는 이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들거야... 그렇지만 그런 것은 다 틀린 생각들이야... 이런
 생각들은 네가 부지런히 노력만 해서 잘 되려는 것을 방해해... 
너를 방황하게 하고 고민하게 할꺼야..... 그러다가 결국 너는
 허송세월을 하게 되고... 
너의 꿈을 이루지 못할꺼야... 그래서 고민이나 방황은 바로 망하는 지름길이야..........

 그러니까 너는 이런 잘못된 생각들을 넘어서서 극복해야 해... 네가 너를 확실하게 믿고... 네가 너에 대해서 든든하게
 자신감을 가져야 해... 
너도 너를 믿지않는다면 누가 너를 믿겠어?... 지혜야... 이 세상을 살다보면 공부보다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을 살면서 보면 공부만큼 쉬운 것도 별로 없거든?.. 공부가 마음대로 안된다고 좌절하면 이 세상에는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돼..... 
너는 지금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바닥에 있잖아?... 그동안
 놀았던 전적이 있으니까 전교1등을 목표로 하는 것은 무리일꺼야.. 
그렇지만 어느 정도 딛고 올라가는 일은 충분히 가능해..
 

 너는 하면 올라가게 돼있어... 믿어지니?... 우리 내기해도 좋아...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하는 거야... 
우리 지혜.. 내가 도와줄께... 내가 받쳐주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다 할께... 너를 믿고, 또 나를 믿고, 우리
 같이 하면 안되겠니?.............."
 

지혜는 고개를 숙이고 내 말을 듣고있다. 아주 먼 길을 달려와서 지친 몸을 쉬고 있는 한마리 사슴처럼 지혜는 조용하고
지혜에게서는 가냘픈 숨소리만 들린다. 어느새 지혜의 눈이 젖는다. 지혜의 양쪽 어깨가 흔들린다. 지혜의 눈에서 뺨으로
눈물 방울이 데구르르 흘러내린다. 
지금 저 쪼끄만게 눈물로 내 마음을 흔들고 있다. 지혜의 눈에서 막 나온 저 작은 눈물
방울 하나가 
이제는 엄청난 바닷물이 되어 내 마음으로 밀려드는 것 같다.
 

이러다가 내 눈도 젖을 것 같다. 이러다가 내가 지혜를 안아버릴 것 같다. 나는 물티슈팩을 열고 한장을 꺼냈다. 한 손으로
지혜의 손을 당겨다가 물티슈를 쥐어주었다. 
지혜는 물티슈가 아니라 다른 손의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러서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보고있는 내가 엄청 답답하다. 내 손에 물티슈를 잡고 다른 손으로 지혜의 어깨를 당겨와서 지혜의 눈물을 닦아준다.
지혜는 내게 거의 안기다시피 하고있다. 지혜는 눈물을 쏟아내고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준다. 지혜의 눈매와 지혜의 뺨을
물티슈로 닦는다. 
지혜는 눈으로 울고 나는 이러는 지혜를 보고 마음으로 운다.
 

그렇지만 닦아도 소용없는 눈물이다. 지혜가 또 쏟아내는 것이 눈물이다. 지혜가 또 쏟아내면 또 흐르고 또 흐르는 것을 나는
또 닦는다. 
그러나 나는 지혜에게 울지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주제에 내가 뭐가 잘나고, 대단하다고, 지혜에게 울어라
말아라 하겠는가? 
울고 싶을 때에는 울어야 한다. 울어서 속이 시원해질 것이라면 왜 울지 말아야 하나? 울고 있는 이 순간
지혜의 마음은 가장 진심일 것이다. 
저 진심 속에 지혜가 우뚝 서기를 바란다. 지혜의 진심과 나의 진심이 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혜는 내게로 쓰러지듯 와라락 안겨왔다. 나는 지혜를 안고 머리를 쓰담쓰담 하며 어깨를 토닥토닥 했다.
 

우리는 한동안 이러고 있었다. 지혜는 계속 흐느끼며 내 티셔츠에 얼굴을 비빈다. 오늘 울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울기로 했다. 
내 전화기에 전화가 들어온다. 아이린이다.
 

"가게에서 내려왔는데... 방에 불이 켜있어서요.............." 

"지혜가 와있어요..........."

"아니... 이 시간에 우리 지혜가 왜요?............"

"그럴 일이 있어요.............."
 

아이린은 갑자기 다짜고짜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잠시 후면 아이린이 그냥 들이닥칠 기세이다. 아마도 아이린은 자기가 자기
아파트로 걸어올라가겠다고 말하면 
내가 내려가서 바래다줄 줄 알고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혜가 내 방에 있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는 지혜에게 말했다.
 

"곧 엄마 오실꺼야.........." 

"엄마가 왜?... 이시간에 여기를 왜 와?..........."

"너 여기 있다고 내가 말씀 드렸거든............."

"에이..... 참................"
 

지혜는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 지혜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은 것 같았다. 지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지혜의
얼굴이 닿았던 내 티셔츠도 지혜의 눈물로 제법 많이 젖어있다. 
아마도 10년 동안에 울을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다. 무엇이
지혜를 이정도로 울게 했을까? 
내 예상대로 문이 열리고 아이린이 들어섰다. 아이린은 지혜 옆에 내 반대쪽으로 앉았다.
그녀는 나와 지혜 그리고 탁자에 와인을 본다. 또 그녀는 지혜의 젖은 눈이 퉁퉁 부어있는 것을 본다.
 

"지혜가 술마시고 주정부렸어요?........."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그러는 것 봤어?............."

"얘가 왜 화를 내?.. 술이랑... 눈물을 보면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나한테 술주정하면서 우냐고 말하면... 우리 둘 사이에 더 이상 대화가 안된다.............."
 

지혜는 또 다시 내게 쓰러졌다. 지혜는 또 흐느낀다. 아이린은 놀란 눈으로 지혜를 보는데 긴장한 표정이다. 나는 지혜의
어깨를 안으며 아이린에게 설명해주었다.
 

"지혜가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는데 또 지혜의 생각대로 안되는 것이 공부잖아요?.. 그래서 우리 아가씨가 너무 크게 실망을
 한 것 같아요... 
답답하니까 잠도 안오고.. 그래서 나한테 올라왔어요..........."
 

지혜가 바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는 여자들이랑 놀고있다가도 내가 전화하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택시타고 달려왔어... 이 남자는 내 말을 다
 들어주고... 나한테 정말 필요한 얘기... 
내가 아직 모르고 있었던 얘기를 해줬거든... 나 오빠 말에 완전 감동먹고 징징짰어..
 그런데 엄마는 뭐야?.. 내가 지금 술주정 부린다고?... 이게 엄마가 자기 딸한테 할 소리야?......."
 

"지혜야... 그.. 그건.............."
 

"자기 딸 자식이 남자 품에 안겨서 울고있는 일이 보통 늘 일어나는 일이야?... 아니잖아?... 그럼 엄마는 엄마니까... 무슨
 일이 있는지 자초지종을 먼저 알아보고... 
조심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게 눈물 한두 방울을 흘린 것인지 내
 눈을 봐요... 
오빠 티셔츠를 저정도로 적셨잖아?... 이게 나한테 늘 있는 일이냐고?.........."
 

"지혜야... 잠시.. 내가.........." 

"엄마랑 나랑... 우리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이건 말이 안돼..............."
 

지혜가 벌떡 일어섰다. 나는 지혜가 화장실 아니면 문 둘 중에 무엇을 택할지를 몰랐다. 나는 지혜보다 빨리 튀어나가서
현관문을 막아섰다.
 

"위로 엄청 나오더니... 아래로도 급해... 헤헤................"
 

지혜가 웃었다. 웃는 지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놓이면서 눈이 시큰해왔다. 지혜야 너는 나의 진정한 여신이다. 지혜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문에 쇠줄을 걸어두고 재빨리 주방으로 가서 와인잔을 소파로 가져왔다. 아이린에게 와인을 따라서
잔을 아이린 앞에 놓아주었다. 
그런데 아이린의 눈이 젖어있다. 모녀가 오늘 같이 울기로 작심했나? 나는 아이린의 손을
꼬옥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잘 될꺼야................"
 

그런데 그때 변기에서 물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달리다시피하여 화장실 앞으로 갔다. 엄청 바쁘다. 그런데 화장실 문이
열려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몸이 훨씬 빨랐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혜는 옷을 바로 입고 세면기에서 손을 씻는다. 원피스차림의 뒤태에는 나를 끄는 뭔가가 있다. 지혜가
나가려고 시도한다면 막을 생각으로 나는 현관 문 쪽에 섰다. 
지혜는 나를 보고 다시 한번 씨익 웃는다. 그리고 소파 쪽으로
걸어간다. 
나도 안심을 하고 지혜의 뒤를 따른다.
 

저 웃음의 의미는 뭐지? 지혜는 주방의 식탁에서 의자를 갖다가 엄마 앞쪽으로 놓고 엄마와 마주 앉았다.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엄마... 엄마는 내가 <왜 울었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혹시 내가 오빠를 유혹하거나 덮칠까봐 겁나?........"

"글쎄............"
 

"나... 오빠랑 뽀뽀는 몰라도, 섹스할 마음 아직은 전혀 없거든요... 내가 미성년자이니까... 오빠도 나랑 하다가 잘못되면
 쇠고랑 차잖아?... 
나... 그런 식으로 오빠 인생에 걸림돌이 돼서 방해할 마음 전혀 없어........"
 

"나는 그런 말이 아니........" 


"또 내가 오빠랑 섹스했다고 해도.. 그게 뭐가 잘못됐어?.. 솔까말로 나 오빠 아기 임신하고싶어.. 그럼 오빠가 다른 여자한테
 한눈 팔지 않고 나한테 집중할껄?..........."


"아니... 얘 말하는 것좀 봐... 지혜야..........."
 

"오빠가 엄마 사위라고 생각해봐... 그게 말이 될 얘기야?... 우리 집?.. 어떤 집인데?.. 엄마 아빠 이혼하고 엄마 혼자 PC방
 하고 사는데 
저런 오빠가 우리 집 사위로 말이 되느냐고?... 그래... 아빠는 제일전자 서영환 전무야... 그러면 뭐해?.....
 서전무는 엄연히 새엄마랑 가정을 꾸렸는데... 이제와서 서전무가 나나 엄마한테 무슨 소용이냐구............"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막 하니?........" 

"엄마한테는 심한 말인지 몰라도... 나한테는 엄청 현실적인 말이거든요........."
 

"그래... 지혜 네가 고등학생이 되니까 내가 감당을 못하겠다... 내가 너한테 좋은 엄마이려면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는것이 다 인줄 알았는데..............."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나갔죠... 지금 나?... 이번에 오빠랑 공부하면서... 학교에서 처음으로 수학시간에 잠 안자고 공부해...
 화학이랑 물리도 책을 읽으면 읽혀... 그런데도 영어는 아직 무리야.. 학교 쌤들 수업이 이제야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고..
 우리가 두세달 공부했어?... 이제 겨우 일주일이거든요... 이게 저 오빠의 파워야... 엄마는 저런 오빠를 사위로 들일 욕심도
 안생겨?..........."
 

"그게.. 지혜야...그러니까.. 나는.........."
 

"돈?.. 저 오빠 아직 대학생이야... 지금 우리한테서 버는 돈이 얼마지?... 또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얼마를 벌을까?...
 내 계산으로 한달에 팔.. 구백은 거뜬히 벌어.. 그럼.. 그게 대학생이 버는 돈 맞아?.. 만일 오빠가 다 때려치우고 과외바닥에
 들어선다고 생각해봐... 
한달에 이.. 삼천 못벌 것 같아?... 솔까말로 도대체 저 오빠에게 아직 뭐가 부족해?... 이 정도보다
 어떻게 더 좋을 수가 있어?... 
우리 주제에 이 오빠는 완벽남 아닌가?.........."
 

"나는 아니라는 말 한 적이 없는데.. 너는 왜..........."
 

"오빠가 나를 얼마나 아껴주고 사랑하는줄 엄마가 알기나 해?... 오빠는 지금까지 내가 하자는 것 다 해주고 내가 투정부리는
 것까지 전부 다 받아줬어... 
오늘도 나 밤 늦게 오빠한테 상담받는다고 올라와서 울어버렸어... 엄마 아빠한테 해보지 못한
 것을 나는 오빠한테 다 했거든... 
그래도 이 착한 오빠는 싫다는 소리를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어... 이 오빠 사위 안삼고
 놓친다면... 엄마는 인생을 잘 못 사는 것 같아.................."
 

그때까지 나는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지혜는 자기 가슴 속에 묻어둔 얘기를 터뜨리는 것 같다. 아이린은 꾸중 듣는
어린이처럼 지혜에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다. 
아이린의 눈에서도 눈물방울이 반짝인다. 이것은 분명 집안 일이니까
내려가서 하면 좋으련만 
내 앞에서 이렇게 하면서 나를 또 곤란하게 만든다. 이제는 나도 한마디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서지혜........" 

"어?... 오빠... 왜?.........."

"너.. 나랑 처음에 한 약속 기억해?.........."

"오빠한테 수업 받으려면 엄마 울지않게 하라고?..........."

"오늘 또 엄마가 내 앞에서 또 우시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하지?............."
 

"엄마.. 이 오빠 말하는 것 잘 봐바... 절대 처움부터 나를 나무라지 않아... 내 입으로 내가 잘못한 것을 불게 만들어... 
 꼬투리를 확실하게 잡아서... 나를 아예 꼼짝 못하게 하거든... 
그리고 나서 자기가 할 말을 마음 놓고 해... 엄마처럼
 넘겨짚고 오해하고 섣불리 덤비냐? 
엄마가 나한테 상처를 준다면, 이 오빠는 지금부터 내 상처를 감살꺼야.. 잘 보고 배워.."
 

"야... 서지혜... 이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난 오늘 솔까말 했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너한테는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지 몰라도... 지금 너랑 나랑은 공부하는 사이야............."

"누가 아니래?..........."

"그런데 무슨 임신을 해?............."

"아... 그거?... 그 정도로 오빠를 사랑한다고.............."
 

"사랑은 한쪽만 하면 너무 아파... 둘이 같이 하면 엄청 행복할 수도 있어... 네가 나한테 나를 사랑할만한 것을 발견했으면..
 내 눈에도 너한테서 그럴만 한 것들이 보여야겠지?..........." 


"난 확실하게 보여줄꺼거든요... 나한테는 지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그런 사람이 마음을 약하게 먹고.. 이 시간에 나한테 와서 울고 짜고 하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를 보이는 정황 만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너도 잘 한 것 없거든... 그런데 네가 엄마를 그렇게 몰아세워서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만들면 되니?.........."
 

"엄마... 봤지?... 이제 날더러 <이것이 잘못이다.> 라고 콕 집잖아?.. 완전 깔끔하지?... 내가 변명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나오면 나는 그냥 당하는 수 밖에 없어... 이러니까 오빠 말에는 내가 불만을 가질 수가 없지... 내가 오빠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오빠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이 남자... 내가 완전 사랑하고 싶다고........."

"요게... 쪼끄만게 벌써 사랑타령이야?........"
 

"엄마 또 봤지?.. 자기가 나한테 너무했다고 생각이 드니까 나한테 반박할 길을 열어주잖아?... 물론 쓰잘데기 없는 거지만..
 이거 하나라도 어디야?... 하하..............."

"무슨 반박을 할건데?..........." 

"오빠... 사랑은 어린이집 다니는 코흘리개들도 하거든요?... 하하하............."
 

이 말에 나와 아이린은 물론이고 지혜까지 빵터졌다. 우리는 와인을 더 마시고 헤어졌다. 당연히 나와 지혜는 아이린을
데려다주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지혜는 계단에서 내게 키스를 열번도 더했다.
 

"오빠... 엄마가 오늘 왜 저러는 줄 알아?............" 

"글쎄?... 지혜가 걱정돼서?..........."


"낮에 오빠랑 공부하면서 내가 몇번 엄마한테 들켰잖아?... 아까 그 일로 꼬투리를 잡아서 확 다 터뜨리려고 덤비다가 내
 반격에 쓰러진거지."
 

"넌... 엄마한테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하니?..........."

"아니... 내 마음도 엄청 아파.. 그렇지만 한번 이렇게 빡씨게 해놓아야.. 내가 마음놓고 오빠랑 키스하죠.. 안그래? 하하..."

"그렇게도 엄마랑 맞장 뜨고싶으면... 나 안보는 데에 가서 둘이 해결하든가........"
 

"아니지.. 내 응원군 오빠가 내 옆에 떡하고 버티고 있어야지... 안그랬더라면 내가 오늘처럼 절대로 할 수 없었어... 내가
 시작만 해놓고 늘 엄마한테 당하기만 했지... 
내가 엄마를 이겨서 뭐 하겠어?... 엄마가 불쌍하잖아?............."
 

"나.. 돌아버릴 것 같아............" 

"괜찮아... 마음 놓고 돌아... 내가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려줄께... 헤헤............"
 

침대에 누워서 나는 지혜가 엄마에게 대들면서 했던 말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지혜가 나한테 고백을 한 것 같다.
그것도 <사귀자>가 아니라 <결혼하자>라고 쪼끄만게 제법 야무지고 제법 당차단 말이야. 공부만 쪼끔 잘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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